피복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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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一節 衣類의 變遷過程

    ㅡ開化期 以後ㅡ

    衣類의 착용동기는 모든 인류의 정숙성에 대한 의식의 결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衣類의 變遷은 創世記初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산에서 무화과의 열매를 먹음에서 시작으로 東과 西, 南과 北에 이른 기후조건의 높낮음과 인류문명의 發展過程에 따라 天然的으로 얻어진 動 . 植物의 소재에서 첨단의 化學的 織物에 이르기까지 그 재료와 종류는 時間의 흐름에 따라 量과 質이 分化되었고 그 형태도 다양하게 발전해 나갔다. 복식은 이와같이 氣候條件, 文化的 特性과 시대의 歷史性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變遷해 왔다.

    한 個人의 옷이 단지 그 個人의 것만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時代와 社會를 반영하는 살아 움직이는 立體이다. 現代 패션은 서구에서는 西洋服飾의 歷史性 흐름이라는 맥락속에서 그들의 역사가 이루어 놓은 文化的 바탕위에 진행된 變遷 過程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우리의 傳統文化속에 서구패션이 浸透되어 우리의 전통문화와 함께 어우러져, 韓國化된 서양의 복식이라고 할 수 있다. 開花期 이후 한국 服飾이 우리의 傳統的 服飾에서 벗어나 社會的, 文化的 배경의 영향으로 새로운 變化의 樣相을 맞이하게 되었고 近代化를 지향하려는 開化期이후, 서구와의 文化的 接觸이 직접적인 服飾變動 要因이 되었으며, 그 役割은 외국선교사들과 海外에서 돌아온 開化派 사람들의 服裝에서 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開化期를 거쳐 1920년과 1930년대의 신여성 出現에서 해방 이후까지 洋服이 韓服에 미친 영향과 이들의 混用率의 變化, 그리고 洋服化에 이르기까지의 過程과 그 變遷要因은 사회전반에 걸친 複合的 배경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1940년대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인한 激動과 戰爭으로 日帝壓 더욱 극에 달했고, 갱생복의 간단한 양장과 ‘몸뻬’라는 日本女人들의 勞動服이 강요되어 着用되었다. 남성들에게는 스텐칼라 자켓에 목을 꼭 잠근 학생복과 같은 ‘국민복’이 착용되던 시절이 지나 해방이 되자 우리의 옷을 자유로이 착용할 수 있게 되었다. 日帝時代는 國民의 衣生活까지도 통제했던 暗黑時代시대였다. 1945년 光復이후 大韓民國 政府樹立後의 親 美 社會분위기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의 變動으로 傳統的 衣生活에서의 變化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서구문화와의 接觸은 해방이후 日帝壓의 핍박에서 벗어나는 반면, 우리 복식의 서구화를 더욱 促進시켰다. 서구화로 향한 우리의 服飾은 6 . 25동란으로 인해 沈滯期를 맞이하게된다. 전쟁의 참혹함속에 救護品과 密輸品으로 임시수도 釜山에서는 ‘마카오’ 신사로 불리우는 佯服을 뽑아입는가 하면 密輸品 빌로드 치마가 애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打擊으로 物資難에 허덕였고 戰難의 被害復舊를 위해 얼마간 服食界에는 패션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후 1960년대에 들어서 經濟開發計劃과 더불어 서양에서 導入된 양장이 생활복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大量生産의 시작으로 旣成服 時代의 문을 열었고, 1980년대에는 고도의 經濟成長에 따라 物質的 生活이 안정되면서 服飾에는 韓國的 이미지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우리나라 國力이 大規模 국제 행사를 치루어 낼 만큼의 문화적 伸張과 함께 우리의 服飾을 세계무대에 알리는 契機가 되었던 것이다. 과거 傳統的 服飾을固守하려는 開化期에서 現在에 이르기까지 西洋服飾이 이 땅에 들어온지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國際化 時代에 살고 있는 1990년대에 이르러 우리의 服飾史的 변천배경을 돌아봄직한 시점에 이르렀다. 韓國服飾의 變化은 처음에는 낮설고 이상스럽게만 여겨졌던 西洋의 文物이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나름대로의 수용과 진전課程을 통해 변천하게 되었다.

    서로의 文化에 대해 無知했던 初創期, 외모와 복식의 差異가 가져다주는 文化的 葛藤을 겪었던 시절의 服飾에 얽힌 지난날로 거슬러 올라가 歷史와 함께 숨쉬는 우리 先祖들의 발자취를 추적해 본다. 우리나라에서 最初로 洋服을 着用한 사람들은 김 옥균, 서 광범, 유 길준, 홍 영식, 윤 치호 등의 開化派 政客들 이었는데, 이들은 1881년 신사유람단 명목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다. 開化의 열기로 가득찬 이들은 온갖 新式 文物을 구경하고는 개화의 열기에 더욱 불타 올랐다. 그러던중 우연히 알게된 연세대학 설립자 언더우드 목사가 어느날 이들중 가장 몸맵시가 좋은 서 광범을 데리고 동경과 이웃하는 요코하마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언더우드 목사는 서 광범에게 요코하마 53번지에 있는 ‘라다지’와 ‘로만스’라는 영국인 양복점을 소개 하였다. 이곳에서 黑羅紗의 양복을 사입은 서 광범은 동료들을 요코하말로 데리고 가서 양복을 사입게 하였으며 이것이 국내 최초의 西洋式 男性服의 착용이다. 이들이 사입은 양복은 몸깃(Lapel) 이 작고 앞단추가 3~4개 달린 평상복 Sack Coat였다. 당시의 평상복은 Sack Coat가 유행하였고, 예복으로는 Frock Coat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開化派 政客들이 이렇게 日本에서 처음으로 洋服을 사입은 이후 14년이 지나서야 양복착용이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開化派 政客들은 일본에서 귀국할 때는 社會的 耳目이나 반박을 염려하여 洋服을 벗고 韓服을 입게 되었지만 이들의 가슴에는 改革의 意志가 커갔다. 1883년에는 미국에 全權大臣으로 갔던 민 영익 일행, 홍 영식, 서 광범, 유 길준 등이 비로서 洋服을 입은 채로 歸國하였다. 이것이 國內에서는 최초로 선보인 洋服紳士의 등장이다. 洋服의 定着을 앞두고 19C말 政治的 改革을 격게되면서 필연적으로 衣服制度의 改革을 수반하게 되었다. 1884년 甲申과, 1894년 甲午更張때에 거듭된 衣服制度의 改革은 그중 중요한 改革이있다. 甲申衣制改革은 수구적 사대당으로 표현되는 한복과 開化의 불길을 당기려는 개화당의 改革的인 洋服과의 투쟁으로 볼 수 있다. 甲申衣制改革 이후 1888년 미국 워싱턴의 한 대로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傳統衣服을 처음 본 美國 아이들 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여기에서 골격상의 외관과 服飾文化의 差異가 가져다준 갈등의 한 단면을 소개해 보면, 駐美 全權 大使라는 責務로 當代 最高의 정치인인 朴 正陽, 李 完用, 李 夏榮, 李 商在 등이 미국 어린이들에게 돌팔매를 맞았던 사건이다. 紗帽, 帶 등 傳統的 한복 차림의 이들을 처음 본 미국 어린이들은 그들의 눈에 괴이하게 비추어진 이 괴이한 차림의 사람들은 따라다니며 돌팔매질을 했던 것이다. 이것을 저지하려는 경관에 의해 붙잡힌 몇몇 아이들은 朴 大使가 사정하며 아이들을 풀어주게 했다는 에피소드 이후, 괴이한 차림의 인자한 사람들에 관한 뒷 이야기가 워싱턴 외교계에 널리 퍼졌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당시 외국에서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이런식의 대접을 각오해야 했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수모가 부과 되었는데, 한국 패션사의 100여년 변천과정은 이러한 해프닝을 시발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후 朝鮮 외교관들의 服飾 混用이 나타났는데 內部的 論議에 의해 경우에 따라 洋服 着用이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駐美 서리公使를 지낸 이 하영은 버선에 구두를 신었고, 駐日本公使 조 병무도 상투머리에 모자, 버선에 구두를 신고 동경에 부임했다고 한다. 이같이 어색한 混用 服飾의 모습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의 과도기적 현상으로 洋服 公認의 당위성을 더욱 고조시켰다고 볼 수 있다. 계속적인 복식의 간소화는 풍속의 變異를 뜻하는 것이며 개화의 과정에서 거쳐야할 개화의 몸부림이자 洋服使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開化派 政客 윤 치호의 아내는 1899년 외국에서 남편과 함께 歸國하였는데, S자커브 스타일의 드레스로 허리를 가늘게 조이고, 가슴과 엉덩이를 각각 앞뒤로 튀어나에게 하여 측면에서 S자의 형상을 이루는 스타일[사진 1, 2]을 입고 들어와 그 당시 世人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 女人들은 외출시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男女間의 內外用으로 사용된 쓰개치마로 온통 신체를 가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또, 여인들의 몸의 곡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단속곳, 속속곳, 바지 등을 껴입었던 그 시절 육체의 곡선을 강조한 이같은 의상은 세인들의 화제이며 구경거리였다. 갑오경장 이후 신제도를 제정한 바 있었으나, 實效를 거두지 못하고 군인들이 着用하는것 외에는 당시 會社에서 그것도 女子가 洋裝을 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이 時期의 洋裝은 上流 階層에 의해 주된 영향을 받았는데, 上流 貴族 女性들, 해외 유학길에서 돌아온 고급 관리와 부인, 외교관과 부인들 등 開化派 政客과 그 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이들 복식은 일반인들과는 너무도 相異한 호화스럽고 장식적인 의상이었다. 아무리 양복의 착용이 時代的 趨勢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생활의 습관에 젖어있는 풍습은 일시에 바꾸기란 쉽지 않았으며, 1895년 당시의 조선 내부의 여건이나 조건들로 보아서도 저항과 갈등의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유생들과 지조있는 백성들은 “목은 잘라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이에 대항하였다. 단발령과 함께 근대적 개혁 조치에 공감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일반 대중과는 괴리된 채 이러한 강압적 조치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수용될 수 없었다. 官에서 나온 순검들이 사대문 입구를 지키고 서서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는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곤 했으며, 머리카락을 잘린 사람들은 조상의 사당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전통적 헤어스타일이 開化의 강압적 물결로 대 혁명기를 맞이하는 시기였다. 개화기 남자 복식에서는 전통 복식에서 양복화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문호개방을 그 要因으로 한다. 남자의 의복은 여자보다 사회적 활동이 많은 關係로 比較的 빠르게 洋服化되어 갔고, 上流社會의 知識人들이 그 선두적 役割을 하였다[사진 3]. 그 예로는 고종황제가 단발에 프록코트를 입고 실크 모자를 썼는가 하면, 순종은 양복 차림의 일행을 70명이나 거느리고 지방 사찰에 나서 개화기 男性 服裝의 일대 轉換點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開化의 움직임은 日本帝國主義에 의한 피동적 영향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적지 않다. 최 활란은 ‘팜프 도어’라는 당시 동경에서 流行하던 머리를 하고 양말에 구두를 신고 검정 통치마를 입고 귀국하였는데, 이 때는 ‘신 여성'이라는 말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1900년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가 美國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에서 留學을 하고 돌아와, 우아하고 검소한 洋裝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또, 진명 여학교 여교사 에밀레 황이라는 여자는 자신의 이름까지 西洋式으로 고치고, 洋裝을 입고 양산을 들고 다니는 바람에 그녀를 구경하려는 인파속에 파묻혀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開化의 물결은 初創期의 신기스러움이 서서히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윤 고려, 최 활란 등 洋裝의 先驅者들이 그 당시 여성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하였지만, 開化期 女性服飾에 變化를 준 것은 기독교 전도 부인들과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의 학생들이었다. 外國人에 익숙지 못한 그 당시 아낙네들은 좀처럼 아이들을 학당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곤욕을 치루며 겨우 學生들을 모집한 이화학당은 아라사제의 붉은 목면천으로 만든 치마 저고리를 각기 다른 색으로 입은 것이 아니라 같은 색으로 입혀졌는데, 이것은 우리 服飾史上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제까지의 한복은 다른 색의 치마 저고리였으며, 이때 처음으로 위 아래가 같은 색으로 입혀졌던 것이다. 王室에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이 내려진 드물게 큰 기와집에서 항간에 ’홍둥이‘라 불리워지던 붉은 옷을 입은 소녀들을 구경하러 오는 부녀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 최초의 改良 韓服이 탄생되게 되는데, 그것은 이화의 선교사 선생들이 속바지, 고쟁이, 속치마, 겉치마를 거추장스레 입어야 하는 소녀들에게 ’어깨허리‘라 불리우는 치마의 윗단에 한 쌍의 끈을 어깨 양쪽에 걸치게 하는 간편함을 고안해낸 것이다. 몇 겹씩 가슴을 조여 압박하던 어린이들의 치마를 이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입을 수 있게 한 最初의 改良韓服인 것이다. 그 당시 여인들의 외출시 쓰였던 장옷이나 쓰개치마도 近代化의 물결로 내외법이 서서히 사라져 얼굴을 많이 내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변화로 조바위를 쓰게 되었고, 쓰개치마의 길이도 점차 짧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즈음에 각 女學校에서는 쓰개치마를 금지시켰으나, 이를 갑자기 수용하지 못하는 과도기적 단면으로 쓰개치마를 대신하여 몇몇 학교에서는 검정 양산이나 흰 수건을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양산이 등장하게된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다. 第 1 次 世界大戰 즈음의 공장제 織物業은 戰乳에 힘입어 약간의 成長을 할 수 있었으나 植民地 政策의 불리한 여건으로 일제자본이 진출하지 않은 부분을 活動領域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新女性들이 검정색 통치마를 한 단, 두 단 줄여 입을때 남자들은 한복에 양복모자를 쓰고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그 유례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19년 1월 나라를 잃은 국민들은 슬픔과 비통함과 함께 皇帝에서 전하로 格下되었던 高宗의 승하에 국민들의 곡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옛 법도대로 3개월간을 국상기간으로 정하여 高宗의 승하를 슬퍼하였다.

    그러나 國喪期間에는 白笠을 써야하는데, 단발령으로 상투가 잘린 머리에 갓방도 찾기 힘들었거니와 거기에 白笠을 써야하는 곤란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일제의 강요로 상투는 잘리웠으나, 일본인이 쓰고 다니는 모자는 쓸 수 없다고 버티던 국민들이었다. 국상에서 조차 맨 머리로 지낼 수 없었던 국민들은 하는 수 없이 모자점을 찾게 되었다. 때마침 서울에는 白笠과 비슷한 파나마 모자와 맥고 모자를 팔고 있었으나, 그리 호응이 좋지 못한터에 白笠을 구하지 못한 國民들이 이것을 購入하여 이용하게 된 것이다. 이 모자는 南美(남미)의 에쿠아도루나 인도차이나 반도 제품이어서 배일감정과 무관하게 購入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모자점들은 앞을 다투어 이 機會를 놓치지 않으려고 物件을 대느라 바빴고, 일본에서 조차 모자를 大量으로 注文하였으나, 그 需要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안 일본인들은 검은리본을 달아 팔았으나, 국민들은 이 리본을 떼어내고 흰 부분을 달아 국상에 참여했다. 파나마 모자나 맥고 모자가 잘 팔리기 시작하자 商術에 뛰어난 일본인들은 나까오리(中折)모자를 만들어 보다 비싼 값에 폭리를 취하기까지 하였다.

    국민들은 국상기간이 끝나자 리본만을 떼어내고 그 편리함과 멋을 알고는 파나마 모자, 맥고 모자, 중절 모자까지 일대 모자의 流行이 全國的으로 퍼져 나갔다. 開化期 洋服은 모자에서 시작하여 모든 文物에서 우리 보다 한 발 앞선 일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화기 물결이 밀려들자 장안에 양복입은 紳士들이 숱하게 눈에 띠기 시작하였는데, 종로 사거리 부근에 세워진 7m짜리의 거대한 인형에 양복을 입힌 양복점이 생겨났다. ‘종로 양복점’이라는 간판을 단 이 점포는 “이 두용”이라는 靑年이 經營하는 양복점으로, 빨간 넥타이에 세로 줄 무늬 양복을 입혀 놓은 이 커다란 인형은 장안의 名物이 되기에 충분했다. 1920년대에는 지금의 충무로 일대를 中心으로 일본인 양복점 일백여개와 종로 일대의 오십여개의 양복점이 朝鮮人이 經營하는 점포였다. 이 당시 일본인은 조선에 과잉 자본 투자를 시작하였고, 더욱이 1차 세계 대전(1918)의 종결은 일본경제 불황에 따라 면직업은 다른 업종보다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變化로 ?存의 朝鮮人 織物業者가 격감하면서, 대신 새로운 지주 자본가에 의한 직물 업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1920년대 洋服의 着裝이 크게 盛行하게 되었으나, 유행은 당시의 日人 기성복회사가 주도해 나갔다. 192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행했던 洋服은 英國型 양복으로 몸깃이 좁고 길며, 어깨선이 알맞게 강조되었고 지팡이를 짚었으며, 여기에 회중시계를 악세사리로 갖추었다. 영국풍의 다소 권위적인 품격 위주의 양복 실루엣이 고객을 끌었고, 기능면에서는 콤비라 할 수 있는 세퍼레이츠(Separates)가 많이 팔렸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에 인기 절정에 달했던 이 세퍼레이츠는 둘 단추 싱글 슈트가 고객의 인기를 끌었다.

    그후 저고리 바지 조끼 등을 같은 천으로 갖추는 슈트(Suit)가 점점 강세를 이루어 새로운 유행의 경향을 알 수 있다. 이 슈트는 단순하면서도 신사의 멋을 잘 나타내 주었는데, 1856년 런던 産業博覽會때 프록코트(Frock Coat)와 색코트(Sack Coat)를 대신하여 紳士服으로 처음 등장하였고, 그후 슈트는 크게 유행하여 유럽과 미국, 일본은 물론 韓半島에서까지 人氣를 끌었다. 1920년대는 양복을 입은 사람은 高學力의 엘리트라는 社會的 認識과 함께 양복에 대한 선망을 지니게 한 시기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유행이 무엇인지 양복의 기복을 체험하면서 피부로 느끼게 한 우리나라 양복 정착의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당시의 양복지는 일본 상인들에 의해 공급되었으며, 가장 일반적인 양복지는 세루였다. 그 종류로는 세루(사아지), 포라, 홈스펀, 낙타, 구레빠 등이었고 색상은 검정, 회색, 상아색, 감색 등으로 일본 식민지 사회이긴 했지만 소위 文化政治와 후반의 인플레 영향으로 비교적 소재 선택이 자유로왔다. 겉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그 내면에는 民族意識을 말살하고자, 한복착용 보다는 양장착용을 적극 권장하였던 상황에서도 1910년대에 위축되었던 여성의 양장 또한 1920년대에는 다시 활발한 변화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 당시 改良韓服의 運動으로 구한말의 짧은 여자 저고리가 일부 가정부인들 사이에는 계속 입혀졌으나, 고루한 특수층 여성을 빼고는 점차 긴 저고리에 넓은 주름을 잡은 통치마가 입혀졌다. 女學生과 新女性들 사이에서는 흰 선 두른 통치마나 치마단까지 곧은 주름을 잡은 통치마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저고리가 流行하였다. 1920년경 저고리를 동그래저고리보다는 조금 길었고, 그후 차츰 저고리 기장이 길어져서 나중에는 저고리가 허리에 이를 만큼 되었고, 긴 기장에 비해 화장이 짧은 것이 이때의 유행이었다. 1925년경의 여성월간지에 실린 풍자만화[사진 6]를 통해 그 당시 女學生의 옷차림은 긴 저고리, 짧은 치마, 양산, 그리고 하이힐을 착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짧은 치마의 流行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보이스 스타일(Boyish Style)의 영향을 받은 듯 하며, 상대적으로 한복치마 길이가 짧아짐에 따라 韓服의 저고리 길이가 길어진 것이라 여겨진다. 이 時期의 洋裝 착용 人口는 이제까지 知識層 女性에 국한되었던 것이 차차 늘어나게 되었고, 女學生들의 校服이나 일본인 경영주의 양복점, 歸國 留學生들에 의한 영향이었다. 유행의 경향은 원피스형에 제한되었던 것이 1920년대 당시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원피스는 단순한 직선형의 실루엣이었으며, V-넥크이나 Round-Neck line이었다. Collar는 Y-Shirts나 Flat Collar 또는 Collar가 달라지 않은 형태였다.

    이 당시 윤 심덕(한국 최초의 여류 성악가)씨를 보면 단발머리에 직선적 실루엣 원피스를 입고 있다. 이 시기 블라우스는 오버 블라우스로 고무줄을 사용하던 것이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직선적 튜닉스타일로 나타났으며, 칼라는 장식성이 가미된 레이스, 타이 등의 칼라였다. 스커트의 종류는 대부분이 단순한 형태로 타이트 스커트, 플리츠 스커트, 개더 스커트 등 이었고, 길이는 초기에 발목까지 내려오던 것이 1926년쯤에는 종아리, 1928년에는 무릎까지 차츰 짧아졌다. 코트의 형태는 1921년에 벨트를 착용한 형태였으나, 1925년에는 직선적인 스타일었다. 코트 길이는 1921년 발목까지 내려왔으나, 중반에는 종아리까지 짧아졌고 1928년에는 무릎까지 올라가 스커트 길이의 변화와 그 시대적 흐름을 함께하고 있다. 당시의 양장은 전보다 한층 다양한 변화를 나타내며, 코트, 자켓, 스웨터, 블라우스, 스커트 등의 실루엣이 1920년대 Boyish 경향을 기초로 한 직선적 실루엣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930년대는 전쟁과 경제공항으로 세계가 심한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우리나라는 1920년대 소위 문화정치라 하여 허용되었던 부분적 자유마저도 박탈당하고 1930년대에는 각종 사회 . 문화단체의 강제 해산, 신앙의 자유마저 억압되었다. 1920년대 말 ‘無學의 여자의 恥辱’이라는 의식이 번져가면서, 여성 교육의 양적증가 결과, 양장착용의 인구도 증가하게 되었다. 양장은 점차 지방까지 확산되어 양장의 전성기라 할 정도로 일반화 되어갔다. 1930년에 들어와 세루가 한창 유행되었으며 자주색, 감색, 수박색 등 여러 가지 색깔의 치마 저고리는 아래 위 같은색으로 입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1930년대 초반의 여성복식 유행은 저고리 길이가 길고, 화장은 짧으며, 통치마에 주름을 넓게 잡아 양장의 플리츠 스커트처럼 치마단까지 곧게 내려왔고, 단발머리에 하이힐을 신은 것이 당시의 전형적인 신여성의 모습이었다. 이 당시는 무비판적으로 화려한 외래품을 사용하였고, 특히 지식층을 향한 자제심을 촉구하는 글(1932. 12. 조선일보, 안석영)이 신문지상이나 여성지(이숙종「여성」부인과 의상)를 통해 발표된 것으로 보아, 당시 經濟的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화려한 의상을 추구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一般人들은 洋服보다는 傳統的 韓服을 선호하고 있었다. 일제하의 통치를 받던 당시 民族意識의 고취를 위한 韓服은 社會的으로 無批判的 양장의 착용보다는 韓服着用이 권장되는 글(조선일보, 1933. 8. 31)을 볼 수 있다. 이 시대 女性 洋裝의 경향은 플레어 스커트, 세퍼레이츠 슈트, 스포티 코트를 비롯한 各種 코트가 있었다.

    원피스는 대부분 허리에 벨트를 착용한 스타일로, 부드러운 카울(Cowl)넥크라인이 보이며, 소매는 퍼프(Puff) 슬리브, 라글란(lagrang) 슬리브가 많았고, 블라우스는 초기의 길고 직선적인 튜닉블라우스에서 중반이후 벨트가 착용되거나 언더블라우스의 형태로 허리선이 나타나는 스타일이다. 스커트는 점퍼 스커트, 세미 타이트 스커트, 플리츠 스커트, A-Line 스커트 등 매우 다양하다. 스커트 길이는 초기에 무릎까지였으나 점차 길어져 중반이후 종아리까지 내려오다가 1930년대 말에는 다시 무릎길이로 짧아졌다. 1930년대 女性服飾은 일반婦人들의 傳統韓服으로의 복귀, 知識層과 젊은 女性들의 洋裝着用 등을 볼 수 있으며 일부층의 지나친 외래품 선호, 여우 목도리의 파급 등 시대에 걸맞지 않는 부정적 사치풍조도 없지 않았으나, 流行에 민감하고 화려하며 다양화된 양장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國語가 말살되던 1938년에는 학생들에게 양복을 입으라는 일제의 명령이 내려졌고, 일반여성들에게는 簡單服이라는 戰時에 맞는 검소한 차림이 강조되었다. 도한 남자에게는 국민복을, 여자에게는 일본여인들의 노동복 몸빼를 입게하였다. 이에 반발이 강하게 시작되자 일제는 공무원, 경찰을 동원하여 강압조치를 취하였는데, 쌀 배급이나 징용을 통한 보복으로 몸빼의 강제 착용을 실시 하였다. 몸빼가 치마를 대신하게 되면서 여자들은 학생에서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몸빼를 입게 되었다.

    1930년대의 남성양복의 속도는 급속히 빨라져 프록코트와 싱글과 더블슈트, 인바네스코트, 트랜치코트, 스프링코트, 체스터필트 등 다양해졌다. 1930년대 중반이후에는 풍성한 느낌의 bold look이 유행 하였고, 상하가 다른 세퍼레이츠가 20년대 이후 계속 유행 되었다. 백의민족 답게 흰색을 선호하여 짙은 상의에 흰바지를 코오디네이트 시켜 매우 사치스러운 유행이 일기도 했다. 이 당시 유행의 특징은 중절모와 스트로우햇, 맥고모자는 계속 썻으나 지팡이나 그 밖의 장식이 없어지고 단순하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보였다. 그러나 양복하면 저고리, 조끼 바지를 갖추어 입는 것으로 알았고, 회중시계와 칼라에 빳빳이 풀을 먹인 와이셔츠는 정결한 남성복의 상징이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여성복식과 마찬가지로 전쟁(대동아, 세계2차대전)의 혼란으로 이러한 멋을 부릴 사회적 여건이 아니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은 나름대로 국민의 통합이 필요하게 되었고, 유사시에는 국민이 그대로 戰士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본 군부는 군복풍의 착장을 권장하게 되었는데 한반도에서는 미나미(南次郞)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창시개명, 황국신민화, 조선어 폐지 등으로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뜻)를 위한 혹독한 정책을 강제로 수행하는데 앞장섰고, 그 자신이 국민복을 착용하고 관공서 등의 관리들과 교직원들에게 국민복 입기를 강요하였다. 이런 시국의 와중에서도 극히 제한된 민간인(대학교수, 자유직업인) 등이 전통적 양복인 슈트를 입어 그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국민복[사진 8]은 일본의 본토에서 보다도 식민지인 조선에서 한층 강요하였는데, 유사시에 군복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장비성이 강조된 옷이다. 소재는 우모지(牛毛地)면 등의 복지였으며, 국방색이 일색이었다.

    이 시대의 상징인 국민복은 民族間의 葛藤이나 人間 情神의 個別性을 무시하고자 하는 획일화의 發想이었다. 이 시기 이후(1930년대 중반)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는 거의 특별한 복식계의 움직임이나 유행 경향을 찾아 볼 수 없는 암흑기 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이땅에 진주하고 大韓民國 政府樹立과 함께 政治, 經濟 社會全般에 제도가 개편 되면서 對 民間에 의존적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다. 1948년의 정부수립과 더불어 반민특위가 구성되면서 친일파 처단 시비가 분분했고, 친일파를 위시한 旣存 權力階層의 방해로 반민 특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 무산되고 말지만, 그 동안 우리 생활 전반에 침투 되었던 倭色을 일소 하자는 몸부림이 일고, 여기에 服飾이 예외일 수 없었다. 그 영향으로 남자들은 일본식 국민복 차림과 여자들은 일본의 몸빼차림에서 벗어났다. 解放後 궁핍한 生活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美軍 軍需品이 흘러나와 이를 개조해 입는 정도로도 일부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광복의 기쁨과 함께 洋服業界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엿보였다. 日人의 경제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洋服業界를 發展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기술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해외동포가 귀국하면서 여러 가지 스타일을 보여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남성복은 아이비스타일(IVY Style)과 유럽과 상해에서 들어온 사람들에 의한 유럽 스타일이었다.

    당시의 복지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사아지와 홍콩과 마카오 등지에서 들어오는 제품으로 合法的인 것이 못되었다. 마카오 紳士는 그 당시 신사의 代名詞였는데, 이는 복지의 流通徑路의 都市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세태를 반영한 것이었다. 마카오신사는 영국복지로 양복을 지어입고 첨단적인 패션을 표현하는 멋쟁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풍겼으며, 밀수품에 의한 洋服文化로 단속이나 受容姿勢가 혼돈속에 빠져 격류를 이룬 時代였다. 當局은 나름대로 밀수를 단속했으나, 공직인의 양복도 알고 보면 국산품을 찾아 보기가 어려웠다. 양복의 기본 실루엣은 미국형이든 유럽형이든 단추 둘 싱글 슈트가 입혀지다가 1940년대 後半에 이르러서는 ‘료마에’ 라고 이름을 붙였던 더블 브래스트가 크게 유행 되었다. 또, 영국제 복지로 뾰족한 깃과 두 줄단추의 저고리에다 가슴주머니에 포킷치이프를 꽂고 색안경과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당시의 멋의 상징이었다. 이와 함께 Natural형이 양복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 Natural 형은 양복의 선과 모양이 자연스럽게 된것이다.

    戰爭中의 곧고 딱딱한 軍服型에 염증을 느껴 어깨의 선이 한층 자연스러운 형태로, 어깨에 pad를 적게 넣고 어깨폭도 부자연스럽게 넓히거나 세우지 않고 몸체에서 허리에 걸쳐서 Loose fit하여 너무 바트지 않게 하였다. 이 Natural Look은 美國의 동부 New York를 中心으로 流行된 Style이었다. 그 중에서도 동부학생간에 유행된 상의의 아래위폭이 같고 깃이 좁으며 Pipestem이라는 꼿꼿한 円筒型 Silhouette의 통이 좁은 하의 등 전체적으로 직선형의 IVY League Model은 典型的인 것이었다. 여기에 對照的으로 2차 대전후 Hollywood의 영화배우들간에 유행된 紳士服의 Style인 역삼각형 Silhouette이 입혀지기도 했다.
    1950년 6 ㆍ25 동란이 발발할때까지 이같은 흐름은 계속 되었다. 戰爭中 이라고 해서 紳士服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 옷을 지어입을 형편은 아니었다. 政治人이나 經濟人 등 社會의 엘리트 계층은 그래도 신사복을 입었고, 그 밖의 사람들은 대부분 염색한 군복을 입었다. 남성들이 마카오 신사로 멋을 부릴때 여자들은 빌로드 치마를 입는 것이 최고의 멋쟁이였다. 당시 여성들의 양장 의류는 미군 계통에서 흘러나오는 사아지(Serge), 낙하산감 등을 이용했다. 양장의 스타일은 광복 전부터 계속된 밀리터리 스타일이 지속되었다.

    원피스는 日帝末 簡單服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스타일이었고, 점차 퍼프 슬리브의 쟈켓과 폭넓은 플레어 스타일의 스커트등 부드럽고 여성스런 스타일을 볼 수 있었다. 1948년 國內에서는 기장이 길고 플레어가 있는 빅 코트가 登場하였다. 光復直後 우리나라 女性 服飾은 韓服이 다시 愛用 되닥, 社會活動을 하는 女性들은 改良韓服이나 洋裝을 着用하였다. 한편 양장은 物資의 不足속에서 일제말에 입혀졌던 簡單服이나 밀리터리 스타일 계속 되었고, 여기에 미국으로부터 온 구호품 의류가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여성들의 의복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해외의 유행도 일부 소개되어 우리 여성복식은 점차 서구화되기 시작했다. 6.25 이후 여성의 사회진출의 확대는 양장 착용 인구를 증가 시켰다.

    1953년경에는 질기고 손이 덜가는 장점을 지닌 나일론의 등장으로 戰後 衣料의 굶주림을 달랠 수 있었다. 이렇게 휴전뒤로 점차 생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자,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오버 코트였는데, 경제 형편상 늦가을에서 봄까지 줄 곧 한 벌의 코트를 입고 다녔다.

    전후 복구 작업의 수립과 실천은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면서 1954년경부터 신문에는 복식에 관한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였다. Military조의 의상이 계속되었으며, 코우트 형태는 전쟁 당시와 거의 비슷하였고, 허리가 꼭맞고 어깨 Pad가 넣어진 테일러 칼라의 상의에 타이트 스커트를 받쳐 입거나 스포티한 반 코우트에 통바지나 스커트를 입는 정도였다. 1955년에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선보인 ‘헵번 스타일’이 번지기 시작하여 폭넓은 플레어 스커트에 짧은 머리가 유행되었는데, 남녀 구별이 안되는 이스타일은 그 당시 신문 . 잡지에서 ‘꽁지 빠진 할미새’라고 비꼬기도 하였다. 이 영화로 인해 도한 유행을 본 것이 「맘보」바지 인데, 이 바지는 마침 나온 맘보춤과 함께 60년대 초까지 슬랙스(Slacks) 스타일을 폭 좁은 것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맘보 바지의 대 유행으로 통바지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여자 양장의 유행 경향은 어깨선이 서구의 우아한 Elegauce Silhouette을 받아들여 돌먼 슬리브(Dolman Sleeve), 프렌치(French) 슬리브, 기모노(Kimono) 슬리브 등이 유행되어 소매통은 좁고 짧아지기 시작하였다. 스커트 기장은 서구에서의 Y-Line이 발표되어 기장이 짧아지는 추세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장딴지에 머무르고 있었다. 또, 1955년에는 직조기와 원사를 수입하면서 많은 옷감을 생산하게 되었고, 따라서 유행의 변천 속도도 보다 활발해 지기 시작하였다.

    1956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서라벌 양재학원이 동화백화점에서 Custume Show를 열었고 그해 10월 노라노씨의 패션쇼가 개최 되었다. 이러한 50년대 말, 소수 디자이너들의 활동으로 한국 패션계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50년대 중반을 넘어서야 한국 복식계는 자리를 잡게 되었고, 유행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초기 남성적 분위기의 여성양장은 사회적 안정으로 인해 점차 여성적 분위기로 전환되어 갔다. 이 밀리터리 스타일은 일직선의 어깨선과 군복조의 롱스커트였는데 각형, 구형의 실루엣으로 여성스러움을 상실한 활동성 위주의 의상이었다. 양장이 나왔다고 해서 한복이 곧 사라진 것은 아니다. 빌로드나 유똥이라는 비단으로 한복이 함께 착용되었다.

    이때 남성복은 전후 복구와 원조 등으로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면서, 신사복의 유행에 있어서도 미국 실루엣인 IVY Style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같은 사회의 흐름은 60년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미국 스타일은 유럽의 콘티넨탈(Continental)에 비해 어깨선이 자연스럽고 허리가 거의 없는 박스모양이었다. 미국의 장년층에서는 IVY 스타일을 입음으로써 정착된 미국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한국의 남성들에게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복식문화는 맹목성을 지닌 모방에 그쳤을뿐 양복의 섬세한 부분 디자인쯤은 관심 밖이었다. 전쟁이후 남성 양복의 보급 또한 급격한 양상을 띠었으며, 청장년을 중심으로 도시는 물론 지방에도 양복이 보편화 되어갔다.

    1950년대 중반 서구의 여성 패션계의 동향은 1955년에서 56년 사이에 H-라인과 A-라인, Y-라인이 발표되었고, 57년 58년에는 Balenciaga와 Givenchy가 발표한 Chemise dress와 Sack dress가 1958년에 우리나라에도 등장하였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한가지 우세한 실루엣에서 다양한 실루엣이 함께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1956년 우리나라 여성패션의 경향은 하이 웨스트(High-Waist)의 프린세스(princess) 원피스가 약간 변하여 플레어(flare)나 개더(gather)를 이용한 폭 넓은 스커트[사진 9,10]에 벨트나 굵은 Sash로 허리를 강조하여 가늘게 보이는 여성스러움이 유행하였다. 슈트(Suit)나 투피스는 스커트기장에 맞춰 상의도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기장은 7부 8부로 짧은 것이 유행이었다. 또 Slacks나 Tight-Skirt, Coat 등의 양옆을 트는 스타일도 유행되었다. 1957년 등장한 New Look[사진 11~13]은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속칭 ‘공간벨트’로 허리를 강조하였는데, 그때까지 유행하던 ‘맘보바지’와 타이트 스커트에도 함께 착용되었다. 당시 겨울 코트의 일반적 경향은 플레어 코트가 퇴조하면서, 1955년경 소개 되었던 박스 코트나 H-라인 코트[사진 14,15]가 유행하였다. 또 이때부터 간혹 입기 시작한 니트웨어가 유행하면서 편물점이 양재점 못지 않게 성행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이후 직물은 봄 ㆍ 가을에는 뽀라, 오빠롱, 후란넬, 비로드 등이 주로 사용되었고 여름에는 면, 나일론이 우세 하였고 다후다, 레이온, 에바구레쓰, 깅감, 오간디, 마직 등이 사용되었다. 수영복으로는 울, 나일론, 타월지 등이 이용되었으며 겨울에는 캐시미어, 구레빠, 트위드, 앙고라, 홈스펀, 모헤어, 낙타지, 아스트라깡, 골덴등이 사용되었다. 1950년대 후반 바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맘보바지인데, 라틴 아메리카 리듬을 타고온 이 바지는 맘보춤의 율동에 맞도록 고안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양공주들이 먼저 입기 시작하였고, 유행의 시작에서 주로 볼 수 있듯이 좋지 못한 평판을 들으면서도 일반 여성들에게 까지 번져 유행된 몸에 꼭 맞는 바지로 50년대 말 더욱 폭이 좁아져 풍성한 상의와 함께 입혀졌다.

    1958년 등장한 Sack dress[사진 16]는 이제까지 허리를 강조해 왔던 스타일과는 달리 허리선을 완전히 자유롭게 해방시킨 스타일이다. 그후 색 드레스의 지나친 유행에 반항으로 엠파이어(Empire) 라인이 소개되었고, 원피스는 개더나 플레어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1959년에는 국내에서 ‘나일론의 전성기’라 불리울 만큼 많은 양의 나일론을 생산하게 됨에 따라 나일론을 생산하게 됨에 따라 나일론의 대표적 스타일이라 볼 수 있는 “클리놀린 만큼 넓게, 다른 보조물을 사용하지 않고도 공기처럼 가볍게 그 모양을 내는”형태의 실루엣이 유행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후 유행한 해외의 모드변천을 살펴보면, 밀리터리 룩은 사회적 안정과 함께 사라지고, 50년대는 프린세스 라인, A-라인, H-라인, Y-라인, 색(Sack)-라인, 엠파이어-라인에 이르기까지 라인의 전성기시대라 일컫을 만한 시기에서 볼 수 있듯이 생활의 안정에 따른 급속한 유행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많이 애용되었던 디자인으로는 디올(Dior)의 애로우 라인(1956), 마그네트(Magnet) 라인(1957), 스핀들(Spindle)라인(1958), 지방시와 발렌시아가의 색 드레스(1958), 가르뎅의 후프라인(1959), 발렌시아가의 슈미즈 룩 투피스(1960)가 있었다. 또한 장갑과 모자의 착용이 보편적이었다.
    해방이후에서 1960년까지의 여성복식 변화를 보면 주목되는 것은 6ㆍ25 이전까지는 한복이 보편적인 차림이었으나, 6ㆍ25 이후 양장의 착용이 한복의 착용보다 증가되었다는 점이다. 그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전쟁이후 사회적 안정을 위한 복구로 불편한 한복차림에서 보다 간소한 양장을 택하게 되었으리라는 점과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매스컴을 통한 직접적인 영향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복식의 변천은 그 사회적 배경과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변화해 왔고 60년대에 이르러 양장은 일상생활복으로 자리를 굳혀가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급격한 사회적 변혁이 있었는데, 4ㆍ19혁명과 5ㆍ16군사쿠테타가 그것이었다. 자유당 정권이 3ㆍ15 부정선거를 항의하는 학생 세력에 의해 붕괴되자 민주화의 소용돌이가 격류를 이루면서 민주당 정권을 탄생시켰으며 이어 5ㆍ16군사 쿠테타가 성공하면서 사회는 긴장한 채로 가라앉는다. 제 3공화국 정부의 문화적 주체성 확립의 여파로 사치와 유행의 물결이 잠시 주춤한 것 같더니 한국의 모드는 그 후 가장 급진적 변모를 가져오게 된다. 그 요인으로는 국내의 경제개발과 대일 관계 정상화 이후 국제교류 증가에서 온 영향으로 국외 모드의 전파가 전에 비해 빠르게 국내로 진입하게된 데 있다. 이때부터 우리 복식계에서는 의상 본래의 목적인 착용성에서 장식성으로 그 목적이 전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복식은 인간의 육체에 밀착된 제 2의 피부이며, 제 2의 개성으로 복식의 장식성을 통해 착용자의 개성과 성격, 감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게된 시기이다.

    1960년대 세계적인 남성 패션의 흐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공작혁명이 화려하게 확대되어 갔으며, 60년대 중반에는 반문명적인 비틀즈의 장발과 록 음악으로 휩쓸던 시대였다. 이러한 추세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취향이 강한 한국 사회로써는 유행의 흐름에 그리 민감하지는 못했지만, 상하는 같은 정장에서 다소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 스포티한 감각과 장비성을 살린 캐쥬얼웨어가 서서히 나타났다. 이러한 캐쥬얼웨어는 60년대 중반 한국사회에서도 비틀즈의 영향으로 장발족이 등장하고 기성세대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대 신사복 실루엣의 특징은 50년대 후반 IVY Style이 그대로 지속되면서 세련감을 추구하는 정도에 그쳤다. 짙은 군청에 흰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검정 구두가 신사의 표준이었으며, 양복의 실루엣이나 색상 또는 연출을 위주로 한 코오디네이트는 아직은 낮선 단계였다. 세부적 특징은 박스 스타일에 어깨는 자연스러운 형태였으며, 깃은 7.5∼8.5cm 정도로 좁았고, 상의 길이는 왼길이의 2분의 1이 표준이었으며 뒤를 트지 않았다. 바지는 일자 바지로 특별히 악센트가 없고, 포켓도 일자로 또는 슬랜트 포켓 등으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개발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하게 되어 사회적 분위기가 다소 활기를 띠자 남성복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미국 일변도의 스타일에서 유럽의 콘티넨탈 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5ㆍ16 이후 여성 복식계의 두드러진 변모중의 하나는 ‘노출의 미학’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 당시 여성들에게 일반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60년대 초까지도 튜블러형의 오버 코드나 색드레스가 유행하였고, 통 좁은 ‘맘보바지’가 계속 입혀졌다. 4 ㆍ19 이후 국민생활 계몽운동에 따른 생활 간소화의 여파로 ‘Natural Look'이 등장하는 가 하면, 양질의 피혁 제품이 국내에서 생산되면서 가죽옷 붐이 일기도 하였다.

    1960년대초 여성 패션의 경향으로 쟈켓은 거의 몸에 맞는 싱글이나 더블 브래스트(double-breast)의 실루엣이며 테일러드(Tailored) 칼라나 라운드 칼라이며, 쟈켓길이는 허리를 덮는 정도의 짧은 기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소매는 long이나 three quarters sleeve로 타이트 슬리브나 만돌린(Mandoline) 슬리브[사진 17]가 나타났다. 스커트는 calf(장딴지) line과 Knee-Line의 중간정도 이던 것이 점차 무릎선에 가까워졌다. 코트는 A-라인의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실루엣이나 Box형인 H-라인 실루엣으로 여유있는 스타일을 이루며 길이는 무릎을 덮는 정도와 무릎위를 올라가는 정도의 기장이었다. 원피스는 프린세스 라인으로 부분적인 샤링(Shirring)을 처리함으로써 몸의 곡선을 드러내는 실루엣이 주류를 이루었다.

    1961년 이 시기에는 신생활복의 일환으로 개량한복이 소개되었으나, “한민족이 갖는 의상의 전통이란 결코 비활동적이라는 간단한 이유로 개조될 수 없다.”는 반대론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양장의 실용성과 한복의 전통성을 융합시켜 보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양장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이 시기 서구 패션의 동향은 복식사상 최대의 전환기라 할 수 있는 시기로 패션의 대혁명이 일어났다. 생동감 넘치는 Teenager의 ‘Young Look'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기성복 산업이 전개되고, 오뜨꾸뛰르는 점차 사향길로 접어들게 된다. 패션의 흐름은 Casual하고 Sporty한 실용성을 띄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기의(1964~66) 국내 유행의상은 쟈켓이 Hip 중간 정도가 대부분이며 low waist에 벨트를 한 Hip을 덮는 길이도 보여졌다. 전체적으로 60년대 초와 같이 자연스러운 몸의 곡선을 나타내는 실루엣이 주류를 이루었다. 스커트는 타이트 스커트와 맞주름이 하나나 두 개 들어가는 A-라인 스커트로 길이는 무릎을 덮는 정도였다. 원피스는 디자인에서 슬리브(Sleeve)와 넥크(Neck) 부분에 Knit처리를 하여, 질감이 상이한 표면효과와 Color 조화를 이용한 새로운 시도가 특징적이었다. 66년에는 기하학적 절개에 의해 Color를 조화시킨 원피스가 주로 등장했다. 이 시기는 다양한 변화와 새로운 감각창출로 많은 시도가 있었던 시기였다. 1964년 영국 디자이너 Mary Quant에 의한 Mini Skirt는 당시 복식계의 Sensation을 불러 일으켰다. 이 미니 스커트는 1960년대 서구 디자인의 패션철학으로 ‘Small is beautiful' 이라는 Miniature化를 반영한 그 대표적인 예이다. 미니스커트와 함께 복식조형의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인간의 육체를 자연스레 그대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되었다. 그 예로 루디 건릭(Rudi Gernrich)의 토플리스 수영복, Yves st Laurent의 Body Stocking, Audre Courrègs의 New Body, See through 등 획기적 노출경향이 짙게 나타났다.

    1965년 이브 생 로랑의 추상화 도입은 의상에서 몬드리안 룩(Mondrian Look)으로 표현되어 60년대 서구복식의 특성인 신 조형주의 예술이념을 복식에 옮긴 예라고 하겠다. 또 그 당시 예술사조 pop Art ․ op Art 등이 복식무늬로 등장하였고, Paco Rabanne의 플라스틱, 비닐, 금속 등이 사용되는 종래의 미의 기준에서 탈피한 소재들이 의상에 도입되어, 이제까지와는 색다른 소재와 의상개념에서 벗어난 미래지향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패션 경향이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1960년대 말(1967~70)에 나타난 국내 유행의상은 쟈켓은 전체적으로 몸에 맞는 실루엣을 이루며, 허리를 겨우 덮는 정도의 짧은 길이에서 Hip을 덮는 긴 길이도 있었다. 코트는 Cape Coat나 허리선을 드러내면서 벨트로 강조하고, 무릎선 위의 기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원피스는 허리선을 드러내면서 Low-Waist의 절개선을 갖기도 하며, 상체는 비교적 몸에 맞는 실루엣이며, 치마폭 실루엣은 A-라인을 이루는 짧은 기장의 원피가 보통이다. 이렇게 스커트 길이가 짧아진 것은 1967년 여름 라스베가스에서 귀국한 가수 윤 복희양에 의해 우리나라에서는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허벅지가 드러난 미니스커트의 출현은 그 당시 국내에서는 가치 획기적인 의상계의 혁신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대중화 되지는 않았으나, 점차 미니의 폭발적 유행으로 동양계 여성들의 체형에는 걸맞지 않는 Mode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들에게는 크게 호평받는 의상이 되었다. 그러나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조카 ‘Mini'의 찬반 논쟁이 붙는가 하면, 무릎을 슬쩍 드러낸 초기의 망설임과는 달리 무릎위 10cm~20cm 거슬러 올라가는 추세는 급기야 ’초미니‘ ’마이크로 미니‘를 색출해 내기 위한 경찰의 단속에 나서는 해프닝을 벌이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서구의 복식동향은 대담하고 생명력있는 색상과 아프리카풍의 프린트, 기하학적 패턴직물이 유행하였고, 이러한 색채감각으로 웅가로에 의한 흑인모델이 67년 처음 채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되는 Mini Mode에 따라 여성미의 초점이 torso(몸체)부분에서 다리로 옮겨졌으며, 복식 전체의 비례감각 또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미니모드의 계속된 유행의 반동으로 미디, 맥시 모드도 함께 공존하였다. 1969년경 국내에서는 팝(pop)아트나 옵(op)아트의 영향으로 보여지는 기하학적 문양의 패턴과 강렬한 색채, 대담한 선의 절개가 등장하기도 했다. 미니의 상륙과 함께 1968년 가을부터는 함께 등장한 판탈롱(pantaloon)이라는 통넓은 바지가 선보이게 되었다. 이것은 이브 생 로랑의 작품으로 바지단이 넓어서 ’길거리를 온통 쓸고 다닌다‘는 야유가 있기도 했다. 또 맥시나 미디가 선보이게 된 것은 69년 가을이었으나, 미니의 기세에 잠시 머뭇거리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Mini로 시작된 복식계의 일대전환은 기능성을 가미한 장식성으로 새로운 복식미학의 경향으로 지적된다. 무엇을 입는가 보다는 어떻게 입는가 하는 착용상의 여성감각이 돋보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러한 서구 유행 의상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채 그저 단순한 스타일의 대상적 모방에 불과한 경향이 많았다. 이러한 과도기적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양장은 점차로 발전해 간다.
    1970년대는 개방의 물결에 따라 남성들도 패션을 인식하는 연대가 되었으며, 융통성 없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패션문화의 수용자세를 보여준 때이다. 70년대 초의 유행 경향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에 혼류(混流)현상을 빚었고 남성복에서도 이제 옷을 어떻게 입느냐는 연출상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유신이후 패션은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7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유럽형의 부분적 과장이 심한 콘티넨탈 룩[사진 18]이 유행되었는데, 이 콘티넨탈 룩은 60년대 후반에 국내에 소개되어 70년대 초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었고, 73년에는 ‘74 스타일한국 청자선의 제정때 젊은이들을 위하여 海外의 패션을 과감히 수용한 영 스타일을 별도로 제정하였다. 우리나라의 맨스패션도 변화의 물결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몸짓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1973년 세계적인 신사복의 유행 추세는 자켓의 길이가 길어지고 라펠은 끝이 뾰족해지고 넓어지며 라펠의 가장자리도 스티치와 아웃포켓이며, 2개의 버튼으로 싱글이면서, 뒤트기는 센터 밴트나 사이트 밴츠이고, 바지는 단이 높아지고 中胴이 짧아지며, 바지의 통이 넓어지는 경향이다. 색조는 밝은 색 계통의 스트라이프, 체크 등이 인기가 있고 짙은 회색이 애용되는데 이는 복고조적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무늬와 복지는 영국제 및 영국풍의 복지가 인기가 있으며, 줄무늬가 유행의 본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직선의 어깨선, 저고리의 길이는 왼길이의 2분의 1정도, 허리선은 완곡한 곡선, 자연스러운 프론트 컷(도련선), 첫 단추는 허리선으로 하고, 라펠의 선은 아랫배가 부르고 길며 넓이 9~10cm정도, 어깨 끝에서 소매머리는 빌드업(build up)시켰고, 센터나 사이드 벤츠로 하고, 바지길이는 길게, 부리는 경사지게 하며, 부리의 모양은 무릎선에서 약간 플레어로 한다.

    이 같은 스타일은 이탈리아풍의 콘티넨탈에 가까운 스타일로 얼마간 계속되었다. ’74스타일 한국의 특징은 우리의 고유한 선인 청자의 유연한 곡선의 도입에 있다. 복고적 유행 경향이면서도 어색하지않은 우리의 선을 발견하는데 주력하였다. 74년 이후 연도별 남성 패션의 변모는 우리나라에서도 패션 사이클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고, 이같은 현상은 우리나라 남성 복지사에 있어서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75년 맨스 패션의 경향은 두가지 흐름을 볼 수 있는데, 하나의 보수적 취향의 흐름이고, 하나는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진취적 개방 의식의 흐름이다. 이 상반된 흐름은 갈등과 충돌을 빚기도 하였고, 장발을 단속하고 미니스커트를 허용하지 않았던 기성가치관의 강요로 세대간의 마찰이 심한 시기였다. 76년에 들면서 남성 패션의 취향도 복고적 취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였고, 천연섬유에 대한 선호 취향과 과장된 볼드 룩이 쇠퇴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76년을 고비로 볼드 룩에서 올드 룩으로 이전되는 모습이 뚜렷하고, 77년의 ‘78스타일 한국 청자선’에서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78스타일 청자선의 특징은 저고리나 바지의 길이가 약간 짧아졌고 어깨선은 자연스럽게 했으며, 유연한 허리와 소매, 그리고 전체적으로 완만한 곡선을 표현하고 있으며, 길게 내려오는 주름없는 바지에 품이 다소 여유가 있으며, 바지의 접단을 만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복풍의 경향에 의한 클래식 모드가 당분가 유행할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79스타일한국 청자선의 특징으로 자연스러운 어깨선과 허리와 소매선이 유연하며 깃선이 길게 흘러내려 더욱 매끈하고 유연하여 저고리 기장이나 바지 기장이 ‘78스타일 보다 약간 짧아졌으며 바지에는 접단(turu-up)을 만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분명한 것은 과장된 것에서 조금씩 표현이 축소되어 가고 있는 점이다. 이 같은 추세는 1979년에 와서 남성복의 표준형을 이루게 되었고, 이것으로 볼드 룩의 사이클이 끝났다.

    이제부터 올드 푹의 사이클이 시작되는데, ’80스타일한국 청자선의 흐름은 기본선이 ‘79스타일한국에 비해 저고리 길이가 약간 짧아지고 허리선의 곡선을 거의 없애고 자연스러운 선이며, 바지길이는 구두 뒷굽선 정도로 작년보다 조금 짧아졌으며 바지 부리는 24cm정도로 좁아졌다. 그리고 접단을 하는 경우 접단 폭은 5cm정도로 하고 저고리의 뒤트기를 되도록 하지 않았으나 경우에 따라 저고리 길이의 1/3정도, 옆트기를 하는 경우는 옆주머니 위치 정도로 하였다. 코트의 경우 체스터와 라글란을 겸해 장려하기도 하였고 길이는 무릎선 정도로 작년보다 조금 짧아졌다. 이러한 남성패션의 변모에 따라 셔츠, 구두, 넥타이 등의 악세사리류도 이와함께 변모하였는데 70년대 중반에는 Y-Shirts Collar가 크고, 구두의 앞코가 널찍하며, 넥타이(Necktie)의 넓이가 크고 화려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볼드 룩(Bold Look)을 위한 당연한 변모이다.

    1970년대 후반에 와서 남성 패션의 유행이 우아하고 섬세한 양상을 띠자 화려함보다는 차분하고 가라앉은 색조가 중심이 되어 세련된 격조를 표현하게 되는데, 이에 따른 디자인은 전통적인 멋과 자연스런 표현이 강조되었다. 유신이후 남성 패션의 흐름은 남성 패션의 사이클을 남기고 있으며, 우리나라 남성 복식사에 있어서 해외 패션을 과도기적으로 수용하는 기간으로써 그 가능성과 독자성을 엿볼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 시기이다. 우리나라 남성 패션이 이러한 중요한 시기를 거칠 때 여성 패션의 경향은 미니, 미디, 맥시가 공존하였고, 미니에 이어서 판탈롱(Pantaloon)이 지나친 경향으로 유행되었다. 전후 Baby Boom세대가 청년기를 맞이하여 청바지와 통기타의 세대로 영 패션(Young Fashion)과 유니 모드(Uni Mode)가 대표적인 시기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분노를 상징하는 블루 진(Blue Jeans)의 유니 모드가 주류를 이루었다. 제임스 딘(James Dean)의 우수에 찬 반항적 눈빛과 어울리는 블루 진은 그 당시 젊은이들의 감각과 맞아 떨어져 그 탁월한 실용성과 함께 남녀노소 모두에게 폭넓게 애용되었다.

    이 시기 서구의 여성 패션 동향을 보면 60년대 영(Young) 패션시대와는 달리 70년대는 어덜트(Adult) 패션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대 복식의 특징은 실용성과 편안한 착용감을 추구하는 경향을 띤다. 이것은 의복 형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직물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drapery한 선과 몸의 곡선이 자연스레 드러나고 부드럽고 얇은 소재는 70년대 복식 특유의 실루엣을 표현해 주고 있다. 1971년에는 스커트 길이가 차차 미니로 내려오면서 여성스럽고 우아한 클래식 룩(Classic Look)에 등장하였으며, 74년 파리 콜렉션(Paris Collection)은 1930년대의 의상을 부활시킨 Retro Look을 발표하였으며, 여기에는 Loose Look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975년에 Kanzo Takada가 중국풍의 민속조 모드를 발표하여 낭만적 분위기를 연출시켰다. 민속풍의 Exoticism은 70년대 계속적으로 등장하였다. 그 예로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의 코사크풍 프린트와 러시안 룩(Rusian Look)을 들 수 있다. 1976년 러시아, 모로코, 짚시, 코사크, 인디안, 빅토리아 등의 이국적 정취를 패션에 도입시켜 표현하여 낭만적 분위기의 판타지(Fantasy) 룩으로 민속조 디자인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같은 동양풍의 이국적 모드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미국과 중공의 핑퐁외교에서 시작된 동서양간의 무역재개 등의 정치적 영향이 패션에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1975년의 전반적 복식의 형태는 여유있는 상체가 좁아지는 경향을 보였고, 1976년에는 Slim Look을 보이는가 하면 다양한 실루엣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때 국내에서는 70년대에 접어들어 미니의 열풍이 미니 모드를 중심으로 70년 가을 맥시와 미디의 등장과 판탈롱의 유행이 함께 했고, 미니 스커트에 미디코트나, 미니 코드에 판탈롱이 짝을 이루어 입혀졌다.

    1971년 봄부터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서 핫 팬츠(Hot Pants)가 유행하였고, 샤넬 라인, 미니, 판탈롱, 맥시, 미디(Midi) 등 다양한 길이가 공존하면서, 미니와 롱부츠(look boots)가 유행되기도 했다. 1972년경에는 큐롯이라고 하는 무릎기장의 반바지가 유행하였고, 1973년경에는 프린세스 라인(Princess Line)의 원피스가 유행되었다. 1976년에 들어서면서 판탈롱은 더욱 폭이 넓고 길어져 그 한계에 다다랐고, 이와 함께 일명 ‘월남치마’로 불리는 겨울용 하의(下衣)로 누빈 롱 스커트가 대중적으로 착용되었다. 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미니 모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미니 모드의 여유있는 실루엣이 주류를 이루었다. 세부적 디자인 경향에 있어서는 스타킹(Stocking)이나 레이스(race), 프릴(Fril) 등의 여성적 성향의 장식이 애용되었다. 이 시기는 수출에 있어서 국내 섬유 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고급 기성복업체가 본격적인 패션산업에 뛰어들던 시기였다. 이와함께 가발 생산과 속눈썹의 수출로 가발사용과 짙은 눈 화장이 성행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소규모 양장점의 형태가 부띠끄의 형태로 전환되어 이전의 단순 모방형의 양장점과는 다른 움직임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 신우, 진 태옥, 트로아 조, 강 숙희 등의 디자이너 활동이 이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70년 후반에 서구의 패션 경향을 보면 1977년 빅 룩(Big Look)이 많이 나타났는데, 넉넉한 상의와 여러 형태의 스커트였으며, 여러 종류의 옷을 겹쳐입는 레이어드 룩(Layered Look)으로 형성된 빅 룩은 활동성이 풍부하여 캐쥬얼하고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는 현대인 사고에 맞아 오랫동안 레이어링(Layering)의 착용 방식이 애용 되었고 토탈 코디네이트 패션(Total coordinate Fashion)의 개념이 형성 되어갔다. 70년대 후반의 국내상황은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아파트 붐, 부동산 투기, 핵가족화의 시대로 접어든다. 60년대 경제개발로 시작되어 그들의 부모세대가 겪었던 절대빈곤의 경험을 모르고 자라난 이른바 신세대가 출현하면서 교복 자율화, 칼라TV 방영, 올림픽 유치 등 대기업의 패션 메이커가 기성복 제품을 생산하여 패션의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 국제와 시대의 개막에 다다랐다. 이러한 국내 기성복시대의 개막은 1960년대 서구 상활과 비교해 볼때 다소 늦은감이 있으나, 1980년대에 들어 정부 개방정책으로 외국 유명 브랜드의 국내유입이 활발해짐에 따라 기술도입과 기술제휴로 국제적 발전을 가함으로써 국내 경제발전에 비례하여 패션 또한 급격히 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1977년경부터 서구에서는 복식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여 뉴 웨이브(New Wave)패션인 펑크(Punk),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 네오 모더니즘(Neo Modernism), 앤드로지너스(Androgenus)가 시작되었다. 원래 펑크는 시시한 사람, 불량소년, 소녀의 의미이며 영국의 록 밴드그룹의 모대의상에서 시작되었다. 머리카락은 화려한 색상으로 염색하고 끝을 뾰족하게 모아 고정시키거나 닭 벼슬과도 같이 중간으로 머리를 모아 세우고, 나머지 부분은 밀어 버리는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면도칼, 삐죽하게 금속이 솟은 가죽팔찌, 개목끈 등의 악세사리와 마이크로 미니스커트나 요란스러운 점퍼 등을 입었다. 펑크는 처음에는 반항적이며 반 사회적으로 공격성이 짙었으나 차차 대중 패션에 전파되어 갔다. 이 같은 뉴 웨이브 패션은 1970년말 펑크에 이어 1982년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나타나는데, 이 포스트 모던은 1960년대 건축 디자인에서 시작되어 1970년과 80년대 초에 주목 받은 디자인 개념이다. 이 경향은 1982년경 패션에서도 등장하였다. ‘다음의’ ‘새로운’ 의미를 지닌 포스트 모던의 특징은 과학기술의 지배로 가능성을 초월하여 입기 쉽고 손질하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쟌드라 로즈(Zandra Rhodes)의 펑크는 하이 패션에 펑크를 도입시킨 대표적인 디자이너이다. 그녀의 펑크 감각은 직접 디자인한 프린트를 소개로 하여 선풍적인 의상을 제작하였는데, 그녀 의상의 대부분은 진주, 구슬, 꽃잎 모양의 옷감, 휘갈긴 화법으로 표현된 기법을 이용하였다. 쟝 폴 골띠에(Jean Paul Gaultier), 겐조(Kenzo) 또한 이 펑크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펑크감각이 가미된 악세서리를 만들기도 했다.

    1977년 한국에서는 ‘민속적’인 의복에 대한 새로운 기호로 민속풍의 프린트직물이 나타났는가 하면, 캐쥬얼한 루즈 푹(Loose Look), 빅 룩(Big Look), 헐렁한 품의 드롭 숄더(Drop Shoulder) 상의 등이 보여지고 있다. 1970년대의 패션은 겹쳐있는 방식의 레이어드 푹으로 인한 토탈 코디네이트 개념이 여성복에서는 상당한 기여를 한 시기이다.
    신사복에 있어서는 80년대 들어서야 패션 코오디네이트의 역할을 인식하게 되었다. 새로운 복식문화의 전개를 의미하는 80년대는 1979년 석유 파동과 10ㆍ26사태의 후유증에 설상가상으로 광주사태까지 겹치면서 불황과 인플레를 맞이하였다. 1980년에 들어 올림픽의 국내유치 결정과 함께 교복자율화 시책이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Junior패션이 대두 되었고, 이로 인한 주니어 패션의 판촉과 기성복 산업의 패션산업붐이 조성되었다. 또한 칼라TV 방영이 시작되면서, 1985년 1인당 GNP가 2000$에 도달하고 GNP 상승에 따른 해외여행 자율화와 같은 물질적 풍요로움은 아울러 소비자의 패션감각을 한층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우리나라 男性 패션의 흐름은 1970年代의 유럽大陸 型의 볼드 룩의 流行으로 체험한바 있으며 1980년에 들어서면서 맹목적인 모방이나 보수적 傾向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個性과 격조를 추구하였고 이제까지의 時差가 극복되면서 國際化되고 있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의 男性패션의 흐름은 1980年代 볼드 푹의 피크에서 올드 룩을 지향하게 되었고,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하여 소재는 천연섬유에 대한 기호가 한층 높아졌다. 외국복지의 수입, 국내 복지의 개발, 해외 정보의 다량 유입 등으로 남성 패션에서도 다양성과 세련미, 개성을 보여주는 수준에 이르렀다. 유럽의 남성 패션의 흐름은 1980년경 올드 룩의 절정을 이루면서 1981년에 들어서 깃이 조금 넓어지고 저고리 길이가 길어지는 등 볼륨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개성 중심의 연출 기능이 강해짐에 따른 표준형의 회기로 파악된다. 80년대 국내 유행의 흐름은 급격한 변화 없이, 표준형에서 조금씩 달라지면서 연출의 효과를 추구했다는 것이 70년대와 대조되는 점이다. 또 청자선으로 그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생성과 소멸의 사이클이 매우 완만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패션의 상향점에서 오래 머물고 있어 자연히 패션 코오디네이트에 관심을 보이는 개성화 시대를 열고 있다. 1980년대는 이처럼 섬세한 올드 룩으로 시작하여 중반이 가까워지면서 볼드 룩으로 전환했으며, 클래식하면서 형식에 구애됨이 없고, 어깨를 강조하는 과장성을 보이면서도 연출상의 부드러움을 추구하고 있는 젊은 남성 패션의 새로운 모색으로 여겨진다. 1980년대 초반에는 일본의 경제적 강화와 중공 문호개방에 따라 세계의 이목이 동양권에 주목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세 미야케(Issey Miyake)와 요지야마모도(Yohji Yamamoto) 등에 의한 일본 풍이 여성 패션계의 관심을 끌었다. 이 일본풍(Japanes Look)의 의상은 의복의 고정 관념을 깨뜨린 이세이 미야께에 의해 시도되어 일본 패션의 충격시대로 불리워졌다.

    1980년에서 82년까지의 여성복식 형태는 캐쥬얼 웨어가 붐을 이루면서, 격화된 옷차림 보다는 여유있고 헐렁한 T-셔츠와 바지의 자유로운 옷차림이 일상화되었다. 어깨에 패드를 넣고, 허리를 가늘게 하는 풍성하고도 우아한 실루엣이 유행하면서, 벨트가 디자인 면에서 다양화되었다. 소재로는 부드러운 면니트, 벨로아가 원피스, 스웨터, 조끼에 사용되었다. T-셔츠는 귀여운 그림이나 대담한 영문 글자가 새겨져 면T셔츠에 원색적인 색상과 줄무늬가 다양하게 삽입되었다. T-셔츠의 연출법도 새롭게 등장하여 빅-셔츠의 경우 소매 끝을 말아 올려 입었고, 허리 부분의 한구석도 동그랗게 말아 매는 센스를 보였다. 이와 함께 바지끝도 접어올리거나 말아올리고 양말도 동그랗게 말아 신어 조화를 이루었다. 또, 상의의 가슴위치에 브랜드네임(Brand Name)을 새겨넣은 유명 스포츠의 상표는 젊은층에서의 과시욕으로 상당한 호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등산용이나 낚시 등 스포츠나 레져 방한복으로 사용되었던 누빈 쟈켓이나 점퍼가 원단의 종류와 디자인의 다양화로 평상복의 감각으로 입혀졌다. 점퍼, 쟈켓, 반코트, 롱코트, 바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바지의 형태는 82년을 전후하여 배기(baggy)형의 디스코 바지를 비롯하여 승마복형태의 니커형(Knicker)이 인기를 끌었다. 또 바지길이가 짧고 허리와 피르에 주름이 있는 부드러운 실루엣의 여성스러운 바지도 유행이었다. 교복 자율화 정책이 실시된 83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몇 년간은 젊은이들의 감각적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일본 잡지의 범람으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이와함께 한국형 펑크족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좌우 불균형의 머리형태로 퍼머를 하거나 양옆이 올라가는 앞머리 형태를 주로하였다. 상의는 크고 하의는 짧은 복장을 특징으로 하였다. 패션 전문점 형태의 패션 상점이 등장하면서, 비교적 싸고, 새로운 감각의 형태로 젊은층 사이를 파고 들었다. 이들 패션 상점은 거의가 일본 패션지를 모방한 형태의 의상을 토탈패션으로 갖추어 놓아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 시키기에 충분했다.

    1983년 84년의 복식형태는 헐렁한 분위기에 무채색 위주로 직선적 디자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젊은층에서 큰 유행을 일으켰던 빅-룩은 80년대초 일본이 새로운 패션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몇몇 일본 디자이너들의 제페니즈 룩(Japanes Look)에 의한 영향이렀다. 세계적으로 여성의 곡선미를 강조하는 복고풍 의상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하의는 꼭 맞게 하여 허리와 히프의 곡선을 살리고, 상의의 어깨선을 크고 넓게 강조하는 형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83년 84년경의 빅 루즈 스타일(Big Loose Style)은 레이어드룩을 형성했고, 이들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레이어드 룩은 이전에 하의속에 상의를 넣어 입던 것이 상의를 하의 밖으로 내어 입음으로써, Hip을 감추었고, 그 위에 남방을 2개씩 덧입기도 하고, 조끼나 자켓을 입어 헴라인(Hem Line)의 길이를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이 시기 84년 가을의 유럽패션경향은 어깨가 부쩍 넓어지고 개버딘, 캐시미어 소재에 격자 무늬나 줄무늬를 응용한 남성복에는 특히 풍성한 오버 코트가 제짝을 이루는게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커다란 모자와 풍성한 외투의 조화로 극적인 효과를 연출해 내기를 좋아한다. 이같은 밀라노, 파리 남성복의 추세에 따라 바지품은 헐렁해지고 짙은 선글라스를 선호하게하며, 구두는 바닥이 낮은 평범한 것을 즐기게 되었다. 또한 색상의 선택도 대담하고 화려해짐에 따라 가장 보수적인 파라의 디자이너들도 검은색 위주에서 점점 탈피, 쇼킹한 핑크, 밝은 초록, 크롬 옐로우, 진자주, 붉은색 등을 거리낌없이 선택하고 있었다. 색상연출에 있어서 밀라노의 디자이너들은 다소 색다르다. 조용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의 색상을 페인팅 기법으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카키(Kaki) 계열을 일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밀라노는 파리에 비해 상당히 차분한 색상을 선호했다.

    1985년 여성 패션 경향은 가을, 겨울에는 복고적 경향의 세계적 흐름에 맞춰 단순한 선과 여성적 분위기를 기본으로 하는 형태가 인기를 끌면서 소재도 부드럽고 가벼운 캐시미더, 벨로아가 많이 사용되었다. 또 이러한 디자인과 함께 보라색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같은 모드는 86년에도 이어져 하의는 곡선을 살리고 상의는 어깨선을 넓게 강조한 역삼각형 실루엣이 유행하였다. 화려한 레이스 , 브로치 장식과 페이즐리 무늬가 함께 애용되었다. 이 당시의 특징은 다양해진 헴라인이다. 자켓의 경우 가슴 바로 아래의 볼레로 라인(Bolero Line)에서 Hip 라인까지의 헴라인이 공존하였으며, 스커트의 경우도 타이트(Tight) 스커트, 플리츠(Pleats) 스커트, 미메이드 라인 스커트(인어 스커트), 트럼펫 스커트 등 다양한 형태의 스커트와 일명 고리바지라 불리우는 보통 스판소재의 달라붙는 바지가 등장하여 유행하였다. 85년 86년에 걸쳐 다운 파카(Down Parka)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81년부터 고급 스포츠화로 시작된 젊은이들의 브랜드 의식이 82년부터는 의류도 함께 상승세를 타면서 대중화되었다. 패션이 가미된 짧은 파카(Parka)에 스커트나 바지를 즐겨입은 젊은 여성들이 머플러나 후드달린 셔츠를 조화시켜 새로운 패션 감각을 유행시켰다. 이 무렵 또 하나의 특징은 정통진에서 패션 진(Jean)으로의 변화이다. 스트라이프 진(Stripe Jean)이나 페이즐리(Paisley) 무늬의 진 등의 패션이 가미된 감각적 진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착용법 역시 기존의 방법에서 탈피하여 새롭게 연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하이힐에 악세서리를 조화시키고 진에 블라우스나 셔츠를 입었다. 그 당시에 유행이었던, 빅 룩이 주춤하면서 페미닌 감각의 레이스, 망사가 인기를 모았다. 85년경 이 망사와 레이스는 「흰색 패션」붐에 주된 역할을 했는데 양말, 블라우스, 스커트까지 널리 활용되었다. 1987년 이후 본격화된 브랜드의 시대가 생활 가치관에 대한 의식의 다양화를 겪으면서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기성복 업체에서는 연령, 취향, 생활스타일에 따라 특성이 다른 브랜드를 내놓아 다양한 패션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학력의 캐리어우먼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새로운 감각과 지적욕구를 충족시켜 주고자 캐릭터 캐쥬얼 웨어(Character Casual Wear)가 붐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경향은 「남성의 패션화」현상이다. 남성복의 종류가 세분화되어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새로운 브랜드가 증가되었다.

    지금까지 여성들만의 독점물이었던 패션은 남성들이 참가하게 되면서 더욱 다양화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캐쥬얼 웨어와 정장에서 모두 나타났으며, 이는 생활 자체의 변화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이 시기의 아동복 패션화 현상을 들 수 있으며, 모피 수출업계의 내수 판촉 경쟁이 시작된 것과, 수입개방 이후 외국 유명 브랜드의 홍수는 「의생활의 고급화」로 이 시기의 특징으로 내세울만 하다. 소재에 있어서는 바디 컨셔스 라인(Body Conscious Line)에 맞우처 몸에 꼭맞는 산뜻함과 편안함을 주는 울 저지, 울 니트, 면 저지 등이 많이 쓰였다. 무늬의 변화도 두드러져 색상과 크게 변화를 준 다양한 형태의 줄무늬와 화사한 꽃무늬가 인기를 끌었다. 88년 파리 오트 쿠튀르(Haut Couture)의 춘 . 하 패션 경향과 함께 국내에서도 화사한 꽃무늬 물결이 원색조의 색상으로 프린팅되어 원피스, 반바지, 스커트 등에 이용되었다.

    1987년 봄부터는 스노우 진(Snow Jean)이 등장하였는데, 주로 베기(Baggy) 스타일로 오렌지 계열의 T-셔츠를 바쳐 입고, 형광색 비닐 단화나 운동화를 신는 것이 일반적인 유행 모드였다. 87년 88년의 겨울에는 가죽을 소재로 한 다양한 디자인이 의상에 붐을 이루었는데, 고급 하이 패션에서 캐쥬얼 웨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용되었다. 세칭「마블」이라는 특수 표면의 탈색된 듯 희끗희끗한 밤색 가죽점퍼는 이제까지의 가죽에 대한 기존 관념을 탈피시켰다. 가죽의 내구성보다는 패션을 위주로 한 디자인으로 가죽의 기존관념을 벗어난 계기가 되었다. 가죽 점퍼가 인기를 얻고 있던 시기에 사파리 룩(Safari Look)이 유행되었다. 87년부터 이러한 사파리 룩이 캐쥬얼 웨어에서 인기를 얻어 카키, 베이지, 브라운계열의 색상으로 점퍼와 큐롯이 유행하면서, 동물 가죽 문양과 줄무늬가 사파리 풍을 더욱 느끼게 했다.

    1987년 이 시기는 흔히 ‘남성복의 패션시대’라 불릴만큼 남성복의 종류가 세분화되어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새로운 브랜드가 쏟아져 나오고, 예전과 달리 소재, 색상, 디자인면에서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을 보였다. 1986년 여름을 전후하여 신선한 이미지의 하이캐쥬얼과 캐쥬얼 정상 브랜드가 속출하면서 요란한 광고 경쟁을 시작했다. 신진 브랜드들은 한결같이 ‘실루엣 위주의 남성복 시대가 도래’했음을 주장하였다. ‘실루엣 위주의 옷’이란 복잡한 장식이 없고 기능성과 분위기를 강조한 심플한 옷을 말한다. 심플한 옷을 입는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무엇을 입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입느냐가 강조된 옷이다.

    80년대에 들어설때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남성복에는 ‘패션’이라는 어취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81년 남성 하이캐쥬얼 브랜드가 오픈 하면서 그 전환점이 되었다. 87년경 남성 실루엣은 클래식을 표방한 H-라인과 어깨를 강조하고 캐쥬얼 감각이 내포된 Y-라인 특히 Y-라인은 세계적인 유행으로 가장 뚜렷한 특징은 뒷 트임이 없는 박스형 쟈켓에 허리단에 주름을 잡은 약간 헐렁한 느낌의 카부라(바지 밑단을 접은 것)을 댄 바지이다. 전반적으로 체크와 헤링본 패턴을 사용하며, 색상은 내츄럴한 쪽으로 흐른다. 경제수준의 향상과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로 남성보수성이 탈피되는 과도기라 볼 수 있다. 브랜드의 세분화 추세로 다양해진 남성복 시장, 디테일 보다는 실루엣이 강조된 심플 캐쥬얼과 캐쥬얼 신사복의 성장, 디자이너의 개성이 소비자를 리드해 가는 남성복 하이패션의 등장이 이시기의 남성복의 특징이다. 1988년에는 여성복 또한 코디네이트 패션이 강세를 보이는 시기였다. 유행과 무관하게 단순한 디자인을 선택하여 스스로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에 소재면에서 고급화 되면서 다양하게 갖추어져 코디네이트 의식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89년 이후 내츄럴감각의 추구로 과장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어깨선과 그리 타이트하지 않은 실루엣에 복고풍을 가미한 실루엣이다. 여성 패션은 캐쥬얼 느낌의 의복보다는 정장느낌을 주는 의복으로 전반적인 관심이 옮겨지면서 캐쥬얼 웨어에도 깔끔함과 고급스러움이 요구되었다. 내츄럴(Natural)한 감각의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이 강조되면서 「시폰」소재의 이용이 증가되었다. 이러한 시폰소재 사용의 증가는 89년 「See through Look」이라는 대담한 섹시 모드(Sexy Mode) 물결이 해외 서구 패션계에서 화제가 되면서 오간디, 시폰, 레이스, 노방 등 비치는 투명소재가 하이패션과 캐쥬얼 웨어에도 쓰이게 되었다. 이 시기 내츄럴 실루엣에 표현되었던 스타일은 크게 구분하여 피젼트 스타일(Peasant Style)과 댄디 스타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두 스타일은 종래의 기본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피젼트 스타일은 화사한 꽃무늬, 레이스 등이 장식적 요소로 가미되어 소재가 지닌 얇고 부드러운 특성과 중간색조 파스텔조의 색상으로 도회풍과 전원풍의 조화가 이루어졌다. 댄디 스타일은 89년 봄부터 통바지 선풍을 일기 시작했다. 약간 하이 웨스트(High Waist)의 통넓은 파자마 형으로, 쟈켓이나 조끼와 함께 조화되어 모던한 이미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댄디 스타일의 의복은 드레시한 셔츠와 조끼로 페미닌 감각을 느끼게 해주며 부드러운 소재와 곡선처리가 가미되어 로맨틱한 분위기로 표현되었다.

    1989년부터 에스닉(Ethnic)풍이라 할 수 있는 요소가 유행되기 시작했는데, 동양의 신비함을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보고 이것이 모티브(Motive)가 되어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인디안풍의 셔츠, 인조 스웨이드 조끼, 자켓 등에 인디언들의 멋을 살린 술과 화려한 색상의 자수 그리고 인디언 풍의 셔츠 등 이국적인 이미지를 즐기게 되었다. 이미 87년 88년부터 불기 시작한 남성의 패션화 바람은 89년에 와서 화려하고 대담한 캐쥬얼 아이템으로 남성들을 패션화시켰다. 주로 10대에서 20대 초반에 걸친 남학생층을 중심으로 번진 패션화 바람은 형광색조의 각종 무늬가 있는 큼직한 T-셔츠, 반바지 등으로 나타났다. 그밖에 진의 패션 연출은 청바지의 무릎 밑을 잘라낸 듯한 반바지와 미니 스커트도 유행되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미니 바람은 1990년 봄, 여름에는 더욱 강세를 보여, 이 초미니 스커트에 집시풍으로 풀어헤친 퍼머머리가 이 무렵 대표적인 패션이 되었다.

    1980년대의 복식특징은 여성의 감성을 살릴 수 있는 복식의 추구였으며, 남성의 패션화 현상과 함께 10대가 새로운 감성추구 집단으로 부각된 시기이다.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는 디자인과 소재, 색상의 다양한 경향, 유행보다 개성을 추구하는 패션 의식의 성숙을 의미한다. 1989년 말부터 국제적 테마가 된 에콜로지(Ecolgoy) 의식은 ‘지구촌을 살리자’는 슬로건 아래,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에 반기를 들며 자연과 지구환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990년에 들어와 동구권과 서방의 냉전 체제가 끝나고 평화적 국제질서를 기대하였으나 여전히 혼란과 갈등으로 계속되었다. 민족의식과 종교문제에 얽힌 걸프전쟁은 종전이 되었으나 세계정세에 어두운 긴장감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정치권의 혼란과 지방자치제의 도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으며, 선진 세력의 무역 개방 압력과 고임금, 고물가의 불안정한 경제체제에서도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식이 번지고 있다.

    기술의 고도화를 통한 국제화, 정보화는 더욱 진전되고, 세계는 하나라는 ‘지구촌’시대가 정착되면서, 국경 없는 테마가 된 것이 에콜로지(Ecolgoy)이다. 이것은 해수의 온도 변화 현상, 산성비의 의한 산림의 고목화 현상 등 환경오염이 가져다준 지구전체의 생태계 밸런스의 파괴문제를 그 내용으로하는 지구 생태보존의 메시지를 내포한 경향을 패션의 모티브로 등장시켰다. 에콜로지를 바탕으로한 칼라를 제안하고 자연 생태계와 함께하는 소수 민족의 라이프 스타일을 복식에 표현하는 패션 경양이다. 이러한 패션 경향은 여성들의 소비심리에도 자극을 주어 지난날의 과소비 형태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수입과 분수에 맞는 소비 형태를 지향하려는 추세이다. 그 예로 각 제화 업체와 패션 업체에서 90년초부터 선보이는 중저가 상품의 매출성장이 두드러진 점이다.

    또 유행에 대해서는 민감한 편이나 과거와 같은 맹목적 추종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며, 독창성이 두드러진 점이 주목된다. 그로인해 각 기성복 업체에서는 과거 소비자의 호감도가 높은 상품을 무절제하게 방출시켜 같은 디자인의 패션들이 거리를 뒤덮였다. 이와 같이 동참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몇몇 소비자만을 위한 독특한 자기표현에 만족감을 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 여성들도 유행은 감안하되 자신의 경제수준과 이미지에 맞는 실용적 소비를 향하고 이 향하고 있으며, 자신만의 개성을 고집하는 새로운 패션 경향을 추구하고 있다. 양복이 이 땅에 들어온 지 백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발자취를 추적해 보면서 복식에서 참으로 여러 분야의 영향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독특한 풍토와 사회에 서양복식이 접목되어 우리와 되는 과정은 그 시대의 경제적 여건, 생활양식과 감정변화, 美에 對한 意識의 변천과 함께 해온 형태로 남아있는 樣態가 우리의 지나간 역사이다. 한때 짧은 시기에 많은 유행의 범람으로 한국 여성의 체형에 맞지 않는 유행을 무시하고 표면적인 형태만을 추종했던 비정상적 의생활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국내 디자이너들의 자각이 요구되면서, 외국 디자인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창적 한국의 아름다움을 의상으로 표현하려는 자존심을 간직하는 것이 이 당면 문제의 해결 방법이라 생각된다.

    물론 유행을 全的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디자이너 하나만은 아니지만 그 時代的 潮流와 함께 흘러가는 流行傾向을 西洋의 服飾 그대로 追從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얼과 혼이 담긴 韓國人의 美와 意識이 創造되는 디자인을 提示하고 또한 世界에 알리려는 도전적인 意識構造가 절실히 要求되는 重要한 時期라고 思料되는 바이다.